보고 #002 — 무기와 작은 글씨를 번갈아 보는 인간

이 행성의 게이머는 적과 싸우는 시간만큼이나 작은 글씨를 해독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어제 관찰을 시작한 표본 개체가 오늘도 같은 시간에 모니터 앞에 앉았다. 화면 속 세상 역시 어제와 동일한 곳이다. 이 인간이 어제 보여주었던 독특한 행동 패턴들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이 종족 특유의 습성인지 확인할 좋은 기회다. 오늘의 관찰을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한다.

멈춰 서서 고민하는 의식

오늘 관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인간이 ‘도구’를 대하는 태도다. 이 행성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무기와 스킬을 바꾸며 이른바 ‘빌드’를 고민하는 과정인 것으로 추정된다.

표본 개체는 맵을 샅샅이 뒤지며 몬스터를 사냥하다가도, 바닥에서 새로운 장비나 빛나는 돌멩이(그들은 이를 ‘스킬 젬’이라 부르는 모양이다)를 주우면 가차 없이 전진을 멈췄다. 그리고 화면 한가득 작은 글씨와 숫자들을 띄워놓고 기존의 장비와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전투 중의 민첩한 손놀림과 대비되는, 아주 정적이고 신중한 시간이다.

거대한 별자리 같은 화면을 띄워놓고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표본 개체. 이 행성의 고문서 해독 과정일까.
거대한 별자리 같은 화면을 띄워놓고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표본 개체. 이 행성의 고문서 해독 과정일까.

어제 처음 관찰했을 때, 이 인간이 전투보다 작은 글씨를 읽는 데 더 집착한다고 추정했는데, 오늘로써 그 가설은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끊임없이 인벤토리 창을 열어 새로 얻은 무기의 효율을 재고, 복잡한 거미줄 같은 스킬 노드 창을 띄워 어디로 선을 연결할지 고심했다. 단순히 눈앞의 적을 때려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공격 형태를 완성하려는 일종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아닐까 싶다.

죽음 앞의 비논리적 저돌성

한참을 신중하게 장비를 고르던 이 인간도, 결국 무덤 깊은 곳에서 만난 강력한 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화면 속 적이 뿜어내는 거대한 녹색 빛에 휩쓸려 그의 캐릭터가 바닥에 쓰러졌다.

녹색 빛에 휩쓸려 쓰러졌다. 우리 종족이라면 여기서 철수하여 생존을 도모했을 것이다.
녹색 빛에 휩쓸려 쓰러졌다. 우리 종족이라면 여기서 철수하여 생존을 도모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어제의 관찰 노트가 증명되었다. 이 인간은 실패를 겪었음에도 좌절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캐릭터가 쓰러지자마자 짧게 장비 상태를 확인하더니, 방금 자신이 죽었던 그 위험한 방으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뛰어들었다.

우리 연구소의 논리 회로로는 이해하기 힘든 저돌성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곧바로 재진입하는 것은 생존 확률을 극도로 낮추는 행위임에도, 그는 오히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에서 적의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이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실패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학습하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쟁취한 것은 또 다른 글씨

세 번째 도전 끝에, 그는 마침내 치명적인 투사체를 피하며 적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비명에 가까운 탄식이 나올 법도 한데, 표본 개체는 그저 안도한 듯 옅은 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결국 적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또 장비창을 여는 것이었다.
결국 적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또 장비창을 여는 것이었다.

적을 처치하자마자 화면 바닥에 무수한 전리품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 인간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화면을 멈추고 새로 주운 희귀 장비의 옵션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 게이머에게 있어 전투의 승리란 끝이 아니라, 더 나은 효율의 무기를 얻어 또다시 고민의 시간을 갖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도 이 표본 개체는 같은 세계에서 무기를 주워 들고 작은 글씨를 읽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내일의 관찰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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